우가행의 영화블로그

영화를 심리적, 과학적 관점으로 해석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 2025. 7. 8.

    by. 우가행1

    목차

       

      왕가위 감독의 『아비정전(Days of Being Wild, 1990)』은 청춘의 사랑과 이별을 다룬 멜로 드라마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인간 관계의 불안정성과 공허함에 대한 깊은 심리학적 통찰이 깔려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사랑을 갈구하지만, 진정한 연결을 이루지 못한 채 방황한다. 본문에서는 특히 서기(장국영)를 중심으로 한 등장인물들의 심리와 영화가 던지는 관계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분석한다.

      영화 아비정전

      1. 서기의 유대 결핍: 애착 이론으로 본 공허한 관계

      서기는 매혹적인 매력을 지녔지만, 내면은 공허하다. 그는 여성들을 유혹하고 쉽게 관계를 맺지만,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이는 불안정 애착(attachment insecurity) 중 ‘회피형 애착(avoidant attachment)’의 전형이다.

      서기는 어린 시절 양어머니에게 사랑을 받지 못한 경험으로 인해, 타인에게 감정적으로 의존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는 관계를 맺을 때 자신이 버림받을 것이라는 불안감을 느끼기 때문에, 아예 타인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대신 표면적인 매혹과 신체적 관계로 공허함을 잠시 메운다.

      2. 유미와 미미: 사랑의 양극단

      서기와 관계를 맺는 두 여성, 유미(장만옥)와 미미(유가령)는 서로 대조적인 심리를 보인다. 유미는 서기의 매혹에 빠져들지만, 그가 결코 자신에게 헌신하지 않을 것임을 깨닫고 떠난다. 그녀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자존심을 지키며 이별을 선택한다.

      반면 미미는 서기와의 관계에 집착하며, 그가 자신을 떠나도 그리움과 외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는 불안형 애착(anxious attachment)의 전형적 모습이다. 미미는 상대방의 사랑을 잃는 것에 극도로 불안을 느끼고, 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관계에 매달린다.

      3. 방황하는 영혼들: 공허함의 연쇄

      『아비정전』의 인물들은 모두 자신만의 방식으로 외로움과 싸운다.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인간이 삶의 의미를 상실할 때 ‘실존적 공허감(existential vacuum)’에 빠진다고 말했다. 영화 속 인물들도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사랑과 관계를 통해 허기를 채우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진통제에 불과하다.

      서기는 필리핀으로 떠나 생모를 찾으려 하지만, 결국 그녀를 만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여정은 의미를 찾기 위한 시도였지만, 끝내 공허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끝난다.

      4. 시간과 기억: 과거에 묶인 현재

      영화는 ‘1분의 시간’이라는 상징을 반복한다. 서기는 유미에게 “이제부터 우리는 평생 잊지 못할 1분을 함께한 사이”라고 말한다. 이 장면은 잠시나마 관계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서기의 심리를 보여준다.

      심리학적으로 인간은 관계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구축한다. 그러나 서기처럼 유대의 경험이 부재한 사람들은 과거의 상처에 묶여 현재의 관계에서도 진정한 친밀함을 이루지 못한다.

      결론: 아비정전은 관계 결핍의 심리학적 자화상이다

      『아비정전』은 단순한 멜로 영화가 아니다. 이 작품은 인간이 관계 속에서 어떻게 의미를 찾으려 하지만, 동시에 그 관계의 불안정성과 결핍에 갇히는지를 심리학적으로 탐구한다.

      서기의 공허한 삶과 방황은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내면의 상처를 비춘다. 심리학적으로 이 영화는 애착이론, 실존적 공허감, 그리고 친밀함에 대한 두려움의 총체적 표현이다.

      『아비정전』은 관객에게 묻는다. “당신은 진정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 아니면 상처받을 두려움 때문에 표면적 연결에 머물러 있는가?” 이 질문은 우리가 타인과 맺는 모든 관계의 깊이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더 나아가 영화는 진정한 친밀함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친밀함은 단순히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상처와 결핍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서기와 그의 주변 인물들은 이 과정을 두려워한 나머지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이는 우리 모두에게 경고한다. 공허함을 채우려는 관계는 오히려 더 큰 공허를 낳을 수 있으며,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반복적으로 관계를 파괴할 수 있다.

      『아비정전』은 말한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상처받고 치유되며, 때로는 그 관계 속에서 자신의 실존적 의미를 발견한다. 그러나 관계가 상처의 회피처가 될 때, 우리는 진정한 자기 자신과도 멀어질 수 있다. 이 영화는 관객의 내면에 질문을 남긴다. “당신은 지금 누구와도 진짜 연결되어 있는가, 아니면 외로움 속에서 방황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결국 자신의 상처와 대면할 용기에서 시작된다.